정필연 작가, 여덟 번째 개인 초대전 《겹으로 쌓여진 기억의 공간》

민화 책가도의 역사적 상징성을 과감한 색면 분할과 흰 여백의 추상적 풍경으로 재조형

한국현대미술신문 송인상 기자 |

 

경기도 포천시 왕방산 기슭의 고즈넉한 자연 속에 자리 잡은 민화 전문 화랑 ‘갤러리 향원재(香園齋)’가 전통 민화 책거리를 현대적인 조형 언어로 재구성해 온 정필연 작가의 여덟 번째 개인 초대전 《겹으로 쌓여진 기억의 공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오는 5월 30일부터 6월 12일까지 보름간 진행되며, 조선 후기 학문 숭상과 입신양명의 상징적 매개체였던 책거리의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현대적 사유와 내면의 감정을 담아내는 열린 공간으로 확장한 신작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정필연 작가는 전통 민화의 엄격한 도상학적 한계를 허물고 기하학적인 화면 분할과 색면의 대비, 선의 리듬감을 통해 독창적인 정물 추상의 세계를 구축해 온 중견 화가다. 이번 기획전은 민화 연구로 체계적인 학술적 기틀을 다진 안호숙 갤러리 향원재 관장의 전문적인 기획과 어우러져, 전통 채색화의 미학을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리는 뜻깊은 예술적 담론을 생산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정조의 학문 숭상에서 민초들의 염원까지, 책거리의 역사적 궤적

 

우리 역사에서 책가도(책거리)가 공식적으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 정조 치세에 이르러서다. 평생 서책을 가까이하며 문치(文治)를 지향했던 정조는 어좌(御座) 뒤편에 책가도를 설치하도록 명하고, 신하들에게 "직접 책을 읽지 못하더라도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배움의 기쁨이 솟아난다"라고 역설하며 학풍을 진흥시키고자 했다.

 

왕실의 권위와 학문 숭상을 상징하던 이 고결한 정물화는 점차 조선 사대부들의 사랑방을 꾸미는 장식화로 번져나갔고,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일반 서민들의 주거 공간까지 파고들며 자손들의 학업 성취와 과거 급제, 그리고 부귀영화와 가문의 번창을 기원하는 기복적인 생활 미술로 완연히 자리 잡았다.

 

왕실의 초기 책가도가 서책만을 정교하게 정렬하여 학문 숭상을 지향했다면, 사대부의 책가도는 문풍을 통한 출세를 지시했고, 서민층의 책가도는 현실적인 욕망과 부모에 대한 효심을 화려한 색채로 표현한 대중적 시각 언어였다. 정필연 작가는 이처럼 조선 시대의 구체적인 삶과 지향점, 그리고 정신세계를 오롯이 담아냈던 책거리의 전통성에 주목하며 오랜 시간 동안 이를 화면에 구현하는 작업에 매진해 왔다.

 

 

형태의 해체와 여백의 미학, 정필연이 펼쳐 보이는 추상적 풍경

 

정필연 작가에게 책가도는 단순히 과거의 사물이나 옛 정물을 캔버스에 재현하는 대상을 넘어선다. 작가는 전통의 고정된 도상학적 형식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사물의 물리적 재현 대신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감각의 구조를 현대적 시선으로 재조명하고자 시도한다.

 

최근 전개되는 작가의 작업들은 책거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상징적 요소들을 명료하게 유지하면서도, 사물의 형태를 극도로 단순화하고 화면을 기하학적으로 분할하는 실험적 조형 방식을 보여준다. 반복적으로 교차하는 세밀한 문양과 강렬한 색면의 배치는 시각적인 긴장감과 리듬을 만들어내며, 과거의 집단적 기억과 현대인의 개별적 감정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일종의 추상화된 정경을 일구어낸다.

 

특히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대표작 <겹의 시간>(2026)을 비롯해, 감각적인 면 분할과 톤의 변주가 돋보이는 <햇살이 바다를 읽는 시간>(2025), 화면의 호흡을 제어하는 <시선의 숨1>(2025) 등의 작품들은 이러한 작가의 조형 철학을 극적으로 투영하고 있다. 정필연 작가의 화면에서 관찰되는 흰 여백은 물리적인 공백이 아닌, 화면의 서사를 확장하는 적극적인 매개체다. 작가는 스스로의 노트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여백의 가치를 부여한다.

 

"내 작업 속 흰 여백은 단순한 비어 있음이 아니다. 그것은 지워진 기억이기도 하고 아직 쓰이지 않은 시간이며, 관람자가 자신의 감정과 기억을 머물게 할 수 있는 열린 사유의 공간이다. 과거의 책거리가 객관화된 욕망과 이상향을 지칭했다면, 지금의 나에게 책거리는 인간 내면의 숨겨진 감정과 흐르는 시간의 궤적을 직조해 내는 마음의 구조물이다."

 

 

본 전시가 개최되는 갤러리 향원재는 단순한 상업 화랑을 넘어 전통 채색화와 현대 민화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학술적 거점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한국 민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안호숙 관장이 지난 2018년 개관한 이 공간은,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왕방산 기슭에서 관람객들에게 깊이 있는 문화적 향유를 제공해 왔다. 전시를 총괄 기획한 안호숙 갤러리 향원재 관장은 정필연 작가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와 이번 개인전의 미술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정필연 작가의 작품은 단순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과거의 장식적 회화를 먼 발치에서 관조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게 합니다. 그것은 아주 먼 옛날부터 겹겹이, 그리고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시간의 흔적들을 조심스럽게 헤집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구체적인 삶과 마음으로 다시 정렬해 보는 고귀한 사유의 공간을 펼쳐 보여줍니다."

 

안호숙 관장의 설명처럼 정필연 작가의 작품들은 문인 사대부들의 수묵화와 구별되는 민화 고유의 화려한 채색 기법을 정통으로 계승하면서도, 이 시대 대중들의 시선과 정서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강력한 동시대적 소통력을 발휘하고 있다.

 

 

《전시 소개》

전시명: 정필연 작가 초대전 《겹으로 쌓여진 기억의 공간》

기  간: 2026년 5월 30일(토) ~ 6월 12일(금) (매주 목요일 휴관)

장  소: 향원재(경기도 포천시 어룡2길 16-34)

 

《정필연 작가 소개》

 

(사)한국민화협회 회원, 충북민미협 회원, 현대민화진흥협회 회원

 

개인전

1회 개인전 《기기묘묘》(한국공예관, 2019)

2회 개인전 《기기묘묘 II》(갤러리공간35, 월간민화 초대전, 2021)

3회 개인전 《기기묘묘 변주》(갤러리정스, 2021)

4회 개인전 《또 다름에》(예일갤러리, 2023)

5회 개인전 《내 안의 것》(갤러리정스, 2023)

6회 개인전 《또, 다름에》(인사아트프라자, 2024)

7회 개인전 《내 안의 별빛》(숲속갤러리, 2025)

8회 개인전 《겹으로 쌓여진 기억의 공간》(갤러리 향원재, 2026)

 

단체전

책 사이의 한 중 민화 이야기(중국 상하이 한국문화원, 2025)

2025 K-ART FESTA(복합문화공간 엘베르 강남, 2025

Rota da Minhwa(브라질 한국문화원, 2025)

 

주요 작품 소장처

충청북도청 <책가도>

허준박물관 <겨우살이>

강진민화뮤지엄 <화접도>

영월민화박물관 <영모도>

서원대학교 교육박물관 <접선부채>